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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기

by 여름하늘나루 2024.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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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픽사베이

 

 

1. 서론

  한국 철학은 신라시대 때부터 고려까지 이어온 불교 사상과 조선시대의 성리학과 실학 등 유교 사상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현대의 대한민국의 법이나 정치사상 등을 보면 조선시대 이전의 불교와 유교 사상과는 관련이 적으며,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철학 등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본론

가. 삼국 시대

  고조선부터 이어오던 원시 종교와 원시 사상의 고유성이 이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던 유교·불교·도교의 충격을 받아 크게 압박받게 되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앞 다투어 이런 사상을 수용하며 사회 체제를 개혁하였습니다.

 

1) 불교

  고구려 소수림왕 2, 백제의 침류왕 원년, 신라의 법흥왕 14년에 시작된 개화 운동으로 인하여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중국의 삼론종의 삼대조까지 된 고구려의 승랑, 인도까지 가서 경률을 가져와 번역한 백제의 겸익,, 중국 유학을 통하여 새로운 불교 이론을 가져와 진호국가사상의 신라 불교를 일으킨 원광, 자장 등이 한국 불교의 조사들이 되겠습니다.

  이들에 의해 삼론학·성실론·천태학·율학·열반학·화엄학·성실론·천태학·율학·열반학· 등이 개창되었으니 한편으로 보면 불교사상의 황금시대가 준비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일본에 진출하게 되면서 일본에서 개화를 촉진시켰습니다.

 

2) 유교

  유교는 보다 일찍 한문의 전래와 함께 들어와 고대 국가의 정치 이념과 함께 사회 윤리로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유교 교육 기관인 태학과 경당의 설치, 백제는 유교박사 고흥과 왕인의 활약 등이 한국 유학으로 가장 처음의 기록으로 남아 있긴 하지만 하나의 사상이론으로 발전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였습니다.

 

3) 도교

  도교는 46세기 경 고구려에 보급되어 왕실과 귀족의 숭신을 받았습니다. 양원왕 이후로 중국과의 접촉을 통하여 도사와 천존상이 들어오고, 나라에서 불교를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하게 되니 혜량, 보덕 등의 고승이 이를 탄식하며 신라로 넘어가는 일까지 발생하였고, 연개소문은 불교 배척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한편 백제에서도 4세기에 도덕경이 전해진 기록이 있으며, 신라는 통일 이후에야 도교를 수용하였습니다.

  

 

나. 통일 신라 시대

1) 화랑도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은 통일신라시대 중추 사상인 화랑도를 이해하는 데 주요한 자료입니다.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최남선은 풍류를 '부루'란 한국어 고유어의 한음역이라고 보고 화랑사상을 그가 주장하는 '태양 숭배'란 고유 신앙에 결부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상윤은 삼국유사의 화랑 창설 기록에 나오는 "왕은 또 천성이 풍미로워 신선을 몹시 숭상한다."라는 문구에 근거하여 최남선의 순어음적 해석에 찬동하지 않았습니다.

 

  최치원의 서문에는 풍류교, 풍월도로 호칭되는 화랑도의 현묘지도는 선사에 상세히 적혀 있다 했으며, 그것은 유··도 삼교를 포함하여 군생을 접화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화랑의 근본 사상을 이룬 현묘한 도는 유··도 삼교의 사상을 모두 포함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삼교를 포용할 수 있는 고유사상이 있었다면 단군 신화를 토대로 하여, 샤머니즘으로 보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며, 최남선과 같이 '', ''의 태양 숭배 종교로 보는 견해가 그다음이 되겠으며, 샤머니즘이란 용어 대신 신도란 용어를 사용하여 원시 다신교적 신앙과 토템 사상까지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습니다.

 

  삼교 중 어느 한 교가 주가 되어 기타 삼교를 포섭하여 삼교 합일을 이루었다고 보는 견해도 가능하지만 지금까지의 문헌으로 보면 도교가 주가 되어 유·불을 포섭했다고 보는 의견(이능화의 조선도교사)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의 화랑들의 기록 <김유신(金庾信)의 산중기도>을 보든 고구려 영류왕 때 당에서 도사와 천존상을 보내와 도법을 강했다는 기록을 보든 당시 당에서의 도교의 형세로 미루어 보자면, 신라 통일 무렵의 도교란 것은 한국의 무속 신앙과 중국의 오두미교적 요소가 혼합하여 그 바탕을 이루었으며, 그 위에 노장의 '허무자연, 장생구시'의 사상, ·제 방사들의 신선 사상, 추연의 음양오행설, 한대의 참위 사상 등을 유합 해서 구성된 혼합체로서의 도교로 생각됩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서는 '무위지사''불언지교'라 하는 것은 이 복합적 요소 중의 신선, 선교적 요소를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풍월이다 풍류다 하는 것도 선교적 요소를 지칭하는 말로 볼 수 있으며, 화랑이 반드시 젊은 소년, 소녀로 풍월주를 삼는 것은 동남, 동녀를 이상화하는 선교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산수를 오유하며 가학으로 서로 즐긴다는 것도 유선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에 도교의 토대 위에 유·불을 포섭했다면 유·불은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통하였는가에 관해서도 문헌이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최치원의 말에 따라 유교는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임금께 충성한다'는 정도로, 불교는 '악한 일은 하지 말고 선한 일은 받들어서 행하라'는 정도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교나 불교는 화랑도들에 있어서는 실천적인 일상생활의 윤리로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 유교

  유교는 통일 이전 신라에 있어서 국가의 제도를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변전시키는 주요 이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신문왕 이후는 국학이 세워지고 오경, 논어, 효경, 문선등이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유교의 교재라고 할만한 것은 전해진 것이 없습니다.

 

3) 불교

  불교는 법흥왕 이후 국가의 숭불 정책으로 인하여 고승, 대덕이 배출되고, 많은 유당 학승들이 돌아와서 심오한 철리를 말하고 불교 저술도 나오고 여러 산문이 종파도 창설하였지만, 원광이 귀산·추항 두 청년에게 보살계 대신 유교 화한 세속오계를 가르친 것이나 원효·의상이 대승불학의 대사이면서 청구비결같은 도참서를 저술했다는 것을 보면 일반 국민에게는 역시 호국 사상이나 유교와 혼합된 세속 윤리나 무속과 혼합되기 쉬운 소승 불교적 요소가 우세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 고려 시대

1) 불교

  신라의 불교사상을 계승한 고려의 불교는 봉건적인 근왕 사상과 합하여 호국 불교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건국 초부터 계속된 팔관회·연등회 등의 국가적인 행사는 불교 의식의 토착화로 보며, 국사·왕사제를 통한 왕권과의 연결, 국난 극복을 위하여 두 차례나 이루어진 대장경 판각, 묘청, 신돈 등 승려의 정치 활동은 모두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전래된 선종불교의 융성과, 태고, 지눌, 혜심 등의 고승이 배출되었으며, 의천은 천태종을 다시 일으켜 선·교 양종의 화합을 모색하였습니다.

 

2) 유교

  신라 중-말기부터 시작한 한문학과 유학은 고려 시대에 정신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고 후기에 새로이 정주학이 도입되어 전통적인 종교와 문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마침내 진보적인 사상 집단을 형성시켜 조선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즉 유학은 이미 봉건사회를 전제를 한 정치·사회·철학·문학 전반에 걸친 이념체계로서 과거제, 충효 사상, 명분론으로 봉건 사회 정비에 기여하였으며, 중기에는 교육·문학 등에 크게 활용되어 사학의 융성, 사장문학의 발달 등을 가져 왔고, 정주학의 전래와 함께 정치·교육상의 혁신사상으로 발전하여 척불론 또는 척사위정론이 전개되었습니다.

 

3) 음양 도참사상

  신라 말기 도선이 도입하였다고 전해지는 풍수지리설이 합리적 사고에 눈뜨지 못한 민중 속에 널리 퍼져 각종 미신적인 비기와 도참을 낳았으며, 이에 중국 전래의 음양오행 사상이 서로 합해져 왕도의 지덕성쇠설, 산천압승술, 연기설 등이 나타나 결국 귀족들의 정권 싸움까지 이용되었습니다.

  

 

라. 조선 시대

  조선 초기 정도전, 권근 등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으나 이 당시 유학은 정치, 경제, 법률, 문장에 관련된 이념에 머무르는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사화 이후 유학자들은 인간의 심성에 주로 관심을 가졌으며 성리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16세기부터 정주계 성리학(주자학)만이 정통을 자처했었습니다. 정주계 성리학에서 주로 논의되었던 것은 사칠론과 이기론입니다. 사단칠기와 이기의 해석을 둘러싸고 주리파, 주기파로 대립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18세기에 호락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낙론은 사람과 짐승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했으며, 호론은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18세기에 왕양명 계통의 성리학인 양명학(심학)이 소수의 학자들에 의하여 수용됐습니다. 16세기부터 양명학이 논의되긴 했었지만 정주계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이단시되어 철저히 배척받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세기에 정제두가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습니다. 정제두는 퇴계의 양명학 변박에 대하여 반론을 펼치며 양명학을 옹호하였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현실 문제에 관한 주자학의 한계를 느껴 주자학을 넘어선 실용 학문인 실학이 연구되었습니다. 경세치용은 토지제도 등을 강조하였으며, 이용후생은 상공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19세기는 고증학의 영향으로 실사구시가 강조되었고, 조선 후기의 실학은 정약용의 경학 사상과 최한기의 유기론적 경험 철학에 융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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