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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심리학자, #찰스 다윈 - 진화론

by 여름하늘나루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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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픽사베이

 

 

1. 찰스 다윈

  찰스 다윈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 진화론에 가장 크게 기여했습니다. 다윈은 생물의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와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인 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우생학 이론을 창시하였던 골턴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 저술한 종의 기원에 결정적인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습니다. 1870년대 많은 사람과 과학계가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형이라는 것에 1930년대~1950년대까지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뀐 내용은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문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2. 진화론 연구

 

  찰스 라이엘은 왕립외과대학에서 다윈이 수집한 화석 뼈 표본을 분석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오웬은 다윈이 수집한 메가테리움과 같은 거대 멸종 육상 동물들의 거의 완벽한 두개골 등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러한 멸종 동물들은 남미의 현존하는 개체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윈은 그의 최초 논문을 썼는데, 남미 대륙이 조금씩 융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3714일 런던지질학회에 회람되었습니다. 다윈은 지질학회 평의회로 선출되었으며, 라이엘 의장은 다윈의 화석에 대한 오웬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를 했으며, 종의 지리적 연속성은 그의 동일과정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윈은 라이엘의 과학 학회에 가입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사를 갔으며, 하느님을 법의 프로그래머로 묘사한 찰스 바비지와 같은 전문가와 회합을 했습니다. 새로운 종의 미스테리 중 미스터리”에” 대한 존 허셜의 편지는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서 찾은 설명과 함께 널리 토론이 되었습니다.

 

  다윈은 레아나 거대한 과나코를 닮은 이상한 마크라우케니아와 같이 멸종했거나, 살아 있는 종의 지리적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가능성에 대해 적색 노트에서 고민 중이었습니다. 수명에 관한 그의 생각, 즉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노트 B7월 중순 경 적게 되었습니다.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고 지리학자로도 활동하며 동물학 연구에 전념하였습니다. 이후 건강이 나빠져 1842년에 런던 교외에 은거하면서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수집 및 정리하는 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1839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 누나인 엠버 웨지우드와 결혼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학문 활동을 했습니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엠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분포와 구조를 발표했으며, 18426,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에 대한 초고를 썼습니다. 1844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호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활발한 학문 활동은 다윈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닌, 독일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한 부인 엠머의 번역 봉사를 받아서 이룬 것이기도 합니다.

 

 

 

3. 종의 기원과 진화론

 

  1856년 진화론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되기 전에 앨프리드 월리스로부터 자기의 학설과 똑같은 취지의 논문이 온 것을 보고 놀랐으나, 친구인 후커와 라이엘의 배려로 1858년에 린네 학회 총회에서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발표하였습니다. 1859'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생물 진화의 사실을 제시하고, '자연선택'을 수립하였습니다.

 

  하나의 어떤 생물이 오랜 세월 동안 환경에 맞추어서 서서히 모습을 변화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발언 중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부분은 당시 유럽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기독교가 그때까지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이었고 다윈의 견해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860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냐 아니냐를 놓고 영국 사회 각계 인사들이 모여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토론회에 다윈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찰스 라이엘, 앨프리드 월리스, 토머스 허슬리 등이 나왔고, 기독교 측으로는 영국 성공회 주교인 윌버포스가 나왔습니다. 당시 논쟁은 생중계되었고, 논쟁 후반에 윌버포스가 진화론 지지 진영을 향하여 당신들의 할아버지의 조상이 원숭이냐, 할머니의 조상이 원숭이냐 라는 질문을 던졌고, 헉슬리는 부도덕한 인간을 할아버지라 하느니 정직한 원숭이를 할아버지라 하겠다고 응수하여 논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이후 진화론을 놓고 격렬한 논쟁의 장이 되었습니다. 생물학자뿐 아니라 구약성서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한 맹렬한 저항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한 10년 동안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동물학과 식물학 및 인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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