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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심리학 여행, 에릭 에릭슨

by 여름하늘나루 2024.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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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홈부르거 에릭슨은 덴마크계 독일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발달 심리학자이자 아동 정신분석학자입니다. 인간의 사회성 발달 이론으로 유명하며, '정체감 위기'라는 단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주요 업적으로는 인간의 전 생애에 걸친 발달 심리학을 다룬 것입니다.

 

 

 

1. 생애

  프랑크푸르트에서 덴마크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에릭 에릭슨은 어린 시절부터 전 생애에 걸쳐 정체감에 대한 심리학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부모가 이혼을 했고 어머니가 독일로 건너가서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친아버지는 유대인 출신의 주식 중매인인 발데마르 이시도르 살로몬 센 이였기에 에릭 에릭슨의 출생신고를 할 때 이름이 '에릭 살로몬 센'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친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자세한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자아 정체감의 발달은 에릭 에릭슨의 삶과 이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과 성인기 초기의 이름은 '에릭 홈부르거'였고, 부모는 에릭 에릭슨의 출생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비밀로 하였습니다. 유대교 가정에서 자라나 파란 눈을 가진 금발의 소년이었고, 사원 학교에서는 노르만인이라며 괴롭힘을 당했으며, 문법학교에서는 유대인이라며 놀림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에릭 에릭슨이 태어난 후 어머니는 간호사가 되기 위하여 카를스루에로 건너갔고, 1904년 유대인 소아과 의사인 테오도어 홈부르거와 재혼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이름이 '에릭 홈부르거'가 되었습니다. 에릭슨의 어머니가 철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에릭슨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2. 정신분석학 입문기

  에릭슨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여덟 살에 김나지움을 졸업한 것이 최종 학력입니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했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고 유럽을 여행하면서 방랑과 방황을 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혁신적 교육기관인 몬테소리의 학위도 취득했습니다. 이 당시에 독학으로 독서와 사색에만 몰두하였습니다. 한 번은 미술가가 되기 위하여 고전미술 공부에도 전념하였지만 이내 포기하였습니다. 안나 프로이트의 소개로 빈 정신분석 연구소에 들어간 후에 헬레네 도이치, 에드워드 비브링, 하인츠 하트만 등 뛰어난 정신분석가의 지도 아래 정신분석 훈련을 받은 그는 1933년 끝내 정신분석가가 되었습니다. 방황기 피렌체에서 만난 아동 정신분석학자 페이스 블로스의 추천으로 칼스루에에서 학교 운영을 도우기도 했습니다. 빈의 사립학교에서 근무하던 때에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 덕에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3. 미국으로의 이민

  에릭슨이 1933년 빈 정신분석 연구소를 졸업한 이후에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시작하자 아내와 함께 덴마크로 건너간 뒤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보스턴에서 아동 정신분석학자가 되었습니다. 에릭슨이 아동 분석가로 이름이 널리 퍼지면서 예일 대학교에 시간제 교수로 채용되었습니다. 에릭슨은 매사추세츠 일반병원과 저지 베이커 가이던스 센터, 하버드 의학전문대학원과 정신과 병원에서 근무를 하면서 뛰어난 임상 의학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1936년 에릭슨은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여 인간관계연구소에 일하면서 의학대학원에서 강의했습니다.

4. 여담

교수로 채용되면서 이전까지 사용하던 이름인 홈부르거를 버리고 성을 에릭슨으로 바꿨으며 미국 시민권도 취득하였습니다. 옛날의 유럽인들에게 성은 귀족들만이 가지는 것이었고 평민들은 성이 없이 '누구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아버지의 이름 뒤에 son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Erik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부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중간 이름을 Homburger로 표기하였고, Erikson이라는 이름은 자신에게 Erik이라는 이름을 준 자신의 생부를 기리기 위해 Erik이라는 이름 뒤에 아들을 덧붙였습니다. 그 이유는 생부와 계부의 흔적을 이름에서 지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본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이기도 합니다. 에릭슨이 성을 바꾼 여러 이유들 중 하나가 사실 아이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성을 바꾸니 가장 좋아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에릭슨의 세 아이들이었는데 학교에서 햄버거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더 이상 햄버거라고 불리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5. 연구 및 활동

  사우스다코타주의 수족 거주지에서 몇 년간 아이들을 관찰한 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교수가 되어 아동복지 연구소에 가입하고 의사로서의 개인영업도 시작하였습니다. 에릭슨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아동기와 사회를 출판한 이후 1950년에 충성 선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던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떠났습니다. 10여년간 매사추세츠주의 Stockbridge에 있는 정신의학 치료시설인 Austen Riggs Center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감정적인 문제를 가진 젊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1960년대 에릭슨은 하버드 대학교의 인간 개발학 교수로 돌아온 뒤 1970년에 은퇴할 때까지 하버드 대학교에 남았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에릭슨은 유록족 인디언의 어린이들을 연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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